6.25 발발 70돌인 올해, 지난 7월 10일 금요일 밤 11시 4분경에 백선엽 예비역 장군이 향년 100세(외국 언론은 9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몽골 현지에서 백선엽 장군 별세 보도 기사를 내려다가 그만 두었다.


몽골 현지 언론이 백 장군 별세 하루 전 발생한 박원순 서울시장 실종과 사망 기사를 내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뉴스 중요도가 떨어진 이유도 있고 백선엽 장군은 몽골과는 특별히 관련이 없는 인사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미국 뉴욕 타임스 보도 기사를 한글로 번역해 몽골 체류 일기로 남겨 둔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 발인은 15일 오전 7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 대장 백선엽 장군, 99세로 별세
Translated in Korean language by Alex E. KANG

한미 두 나라 군대에서 6.25 전쟁 영웅으로 추앙 받아 온 백 장군은 고국에서는 극단적인 양면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백 장군을 일제에 협력한 반역자로도 보고 있다.


▲1953년 백선엽 장군이 군 의장대 사열에 나섰다. 프레드 워터스 / AP통신

2020년 7월 11일 토요일

한미 두 나라 군대에서 6.25사변의 영웅으로 추앙 받았으나, 그의 조국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반역자 취급을 받던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 대장 백선엽 장군이, 7월 10일 금요일 밤 11시 4분 별세했다. 향년 99세를 일기로 별세한 것이다.

비록 6.25사변 중에 중요하고도 치열했던 전투에서 그의 군 통솔력이 널리 공인됐음에도 불구하고, 백 장군은 그의 고국에서 극단적인 양면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지난 2009년에 대한민국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제국주의 일본의 한반도 강점기 때 일본인들에게 협력했던 "친일 반민족" 인사들(705명) 명단에 백 장군의 이름을 등재했다.

백 장군을 영웅으로 대우해야 하느냐, 아니면 반역자로 대우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한국 근대사(近代史)를 읽는 방법 측면에서 한미 두 나라 사이에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

역대 주한 미군 사령관들은, 한국에 부임할 때마다, 백 장군을 늘 귀빈으로 초청하곤 했다. 7월 11일 토요일, 주한 미군 사령관은 백 장군의 별세에 애도의 뜻을 표했다.

7월 11일 토요일, 미 육군 대장인 로버트 비(B). 에이브럼스 주한 미군 사령관은 성명을 통해 "백선엽 장군은 진정으로 그리워하게 될 영웅이며 국가적 보배"라고 추모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런 정서에 공감하지 않고 있다.

지난 6월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들의 54 퍼센트가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시신은 다른 곳으로 이장돼야 한다고 답했다. 본 설문 조사는 백 장군의 가족에게 백 장군의 국립현충원 안장 선택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문제를 둘러싼 격론이 벌어지면서 실시됐다. 수천 명의 6.25사변 참전 용사들이 그곳에 안장돼 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백 장군의 유족과 상의를 마치고, 백 장군은 오는 수요일 대한민국 육군장으로 서울 남쪽에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경두(鄭景斗) 국방부 장관은 백 장군이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데 기여한 분"이라고 말했다.

보수 제1야당인 통합미래당도 백 장군을 추어올렸다. 김은혜(金恩慧) 미래통합당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백선엽 장군은 살아 있는 6.25 전쟁 영웅이요,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밝혔다.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한민국 보수 지도자들은 종종 백 장군의 존재를 내세워 6.25사변 중에 구축된 한미 두나라 동맹을 의인화(擬人化)하기도 했다.

반면에, 집권 여당인 더불어 민주당은 백 장군의 별세와 관해 당 차원의 공식 논평을 내놓지 않기로 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은 백 장군의 국립현충원 안장을 반대하고 이미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11명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파묘(破墓=시신을 무덤에서 파내는 일)해 그 가족들이 각자 시신들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도록 하는 국립묘지법 개정을 요구했다. 11명 대부분이 6.25사변 중 그들이 세운 전공으로 서울과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상황이다.


▲7월 11일 토요일, 조문에 나선 한국인들이 백 장군 빈소에서 조의를 표했다. 김인철 / AP통신

백 장군은 1920년 평남 강서군 출생으로, 현재 북한 영토가 돼 있는 그의 고향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였다.

1941년에 백 장군은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傀儡) 국가인 만주국의 봉천군관학교에 입교한 뒤, 항일 무장 독립운동 세력(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던 것으로 알려진 만주 간도 특설대(間島特設隊)에서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다. 백 장군은, 자신이 만주 간도 특설대(間島特設隊)에서 복무하긴 했으나, 항일 무장 독립운동 세력(동북항일연군)과의 전투에는 자신은 전혀 참여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백 장군이 만주군 중위였을 때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는 바람에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으나, 얼마 뒤 한반도는 둘로 분단돼 남반부에는 친미 성향의 대한민국 정부가, 북반부에는 북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됐다. 백 장군은 만주군 장교 복무 경력으로 인해 미국이 한국군 창설을 지원하면서 한국군 장교로 등용됐다.

백 장군이 대한민국 육군 보병 제1사단장이던 1950년에 북한이 한국을 침공해 장장 3년 동안 이어졌던 6.25사변이 발발했다. 한국 침공에 나선 북한군은 속전속결로 오합지졸의 한국군을 한국 영토의 동남쪽 구석으로 밀어붙였고, 그 구석 뒤쪽에는 한국군의 부산 방어선이 구축됐다.

백 장군의 지휘로 한국군 제1사단(師團) 병력은 6.25사변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대구 북방 다부동(多富洞) 전투에서 숭리를 거뒀고, 북한군의 부산 방어선 돌파를 차단하는 데에 일조했다. 한국군은 미군이 주도하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북한군과 전투를 벌여, 결국 북한군을 북쪽으로 밀어냈다.

"평양을 탈환했던 그 날은 아주 제 일생의 아주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백 장군은 뒷날 그렇게 회고했다.

6.25사변 중에, 백 장군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됐으며, 33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건국 후 첫 번째 육군 대장이 됐다. 6.25사변은 결국 교착 상태로 마무리됐고 현재까지 이어져 휴전 상태는 67세의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1960년 군 예편 이후, 백 장군은 대만 주재, 프랑스 주재, 그리고 캐나다 주재 대한민국 특명전권 대사를 역임했다. 아울러, 1969년부터 1971년까지는 교통부 장관으로도 재직했다.

지난 2010년, 대한민국 국방부는 백 장군의 명예 원수(元帥=5성 장군) 추대 작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일반 대중의 반발과 6.25사변 참전 용사들 중 그를 꺼려하는 인사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백선엽을 ‘영웅’이라고 하면 간도특설대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독립투사들은 어떻게 되나."라고 김원웅(金元雄) 대한민국 광복회장은 반문했다. 광복회는 회원들의 독립 투쟁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공인을 받은 영향력 있는 단체다. "백선엽이 ‘6.25 영웅’ 대접을 받으려면 최소한 광복 이전의 친일 활동에 대해 참회나 반성을 해야 했다."

"하지만 백선엽은 지금까지 한번도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참회나 반성을 하지 않았다."라고 김원웅 광복회장은 지난해 보도된 대담 기사에서 밝혔다.

별세한 백 장군은 유족으로 부인 노인숙(盧仁淑) 여사(현재 95세, 1925년생)와 2남 (남혁-남흥) 2녀(남희-남순)를 남겼다.

[애도] 백선엽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 대장 (1920. 11. 23~2020. 07. 10 PM 23:04)

☞English language
Paik Sun-yup, South Korea's First Four-Star General, Dies at 99
Considered a Korean War hero by the U.S. and South Korean militaries, he was a deeply divisive figure at home. Many also saw him as a traitor who collaborated with Japanese colonizers.


▲Gen. Paik Sun-yup reviewing troops in South Korea in 1953. Fred Waters / Associated Press
July 11, 2020

SEOUL, South Korea-Paik Sun-yup, South Korea's first four-star general, who was lionized as a Korean War hero by the South Korean and United States militaries but dismissed by many in his country as a traitor, died on Friday. He was 99. Though widely credited for leading his troops in a pivotal and fiercely fought battle of the Korean War, Mr. Paik was a deeply divisive figure in his home country. In 2009, a South Korean presidential committee put him on a list of "pro-Japanese and anti-nation"figures who collaborated with Japanese colonizers during their rule of the Korean Peninsula.

Whether to treat Mr. Paik as a hero or a traitor has also highlighted differences in how South Korea and the United States have read modern Korean history.

Whenever they arrived in South Korea, top commanders of the U.S. military had always made a point of inviting Mr. Paik as an honored guest. On Saturday, the American commander in South Korea paid tribute to him.

"General Paik is a hero and national treasure who will be truly missed," Gen. Robert B. Abrams, the top U.S. general in South Korea, said in a statement on Saturday.

Many South Koreans don't share that sentiment.

In a poll conducted last month, 54 percent of respondents said that the remains of pro-Japanese collaborators interred in national cemeteries should be moved elsewhere. The survey was taken as a debate raged over whether Mr. Paik's family should be given the option of burying him in a national cemetery. Thousands of Korean War veterans have been interred there.

After consulting with his family, the South Korean Army said Mr. Paik would be buried in a national cemetery south of Seoul on Wednesday in a funeral arranged by the Army. Defense Minister Jeong Kyeong-doo said Mr. Paik "helped defend freedom and peace in South Korea. "

The United Future Party, the main conservative opposition party, also praised Mr. Paik.

"He has been a living hero of the Korean War, a living legend," said Kim Eun-hye, a party spokeswoman. Conservative leaders who emphasize the importance of the United States alliance had often pointed to Mr. Paik as a personification of the bilateral ties forged during the war.

But the governing liberal Democratic Party decided not to comment on Mr. Paik's death.

Some of the party's lawmakers have opposed burying Mr. Paik in a national cemetery and have called for revising the law on national cemeteries to disinter the bodies of 11 pro-Japanese collaborators already buried there and make their families bury them elsewhere. Most of the 11 were buried there for their roles in the Korean War.

▲South Koreans paying tribute to Mr. Paik at a mortuary on Saturday. Kim in-Chul / via Associated Press

Mr. Paik was born in 1920 in Gangseo, in what is now North Korea. Korea was a colony of Japan from 1910 to 1945.

In 1941 he joined the army of Manchukuo, a puppet state that imperial Japan established in Manchuria, serving in a unit known for hunting down Korean guerrillas fighting for independence. Mr. Paik said that while he served in the unit, he never engaged in battles with Korean guerrillas.

He was a first lieutenant when Japan was defeated in World War II and Korea was liberated-after which it was divided into the pro-American South and the Communist North. Mr. Paik was among the Koreans in Japan's colonial military who were recruited when the United States helped build a military for the South.

He was a division commander when North Korea invaded the South in 1950 to start the three-year Korean War. The invaders quickly pushed the South's ragtag army into the southeastern corner of South Korea, behind what was known as the Pusan Perimeter.

Mr. Paik is credited for leading his division in the Battle of Tabu-dong, one of the fiercest in the war, which helped block North Korean troops from breaching the Pusan Perimeter. South Korean troops fought as part of the American-led United Nations forces, which later pushed the North Koreans back to the North.

"The day we entered Pyongyang was the best day of my life," Mr. Paik recalled later.

During the war, Mr. Paik was made Army chief of staff and then, at age 33, a four-star general, the first in South Korea. The war eventually ended in a stalemate that continues today under a 67-year-old truce.

After retiring from the military in 1960, Mr. Paik served as South Korea's ambassador to Taiwan and France, among other diplomatic postings. He also served as transportation minister from 1969 to 1971.

In 2010, the South Korean military tried to make Mr. Paik its first honorary five-star general. But that plan was quickly scuttled because of a backlash from the public and from his detractors among Korean War veterans.

"If Paik Sun-yup is called a ‘hero, ‘ what does that make Korean independence fighters who lost their lives at the hand of his old Manchuria unit?"asked Kim Won-woong, the head of Heritage of Korean Independence, an influential group recognized by the government for its members' struggle for independence. "If he really wanted to be treated like ‘a Korean War hero, ‘ he should at least have expressed repentance and remorse for his pro-Japanese deed. "

"But he never has," Mr. Kim said in an interview published last year.

Mr. Paik is survived by his wife, two sons and two daughters.

여기서부터는 본 기자의 글이다. 백선엽 장군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국가원수(國家元首, Head of state=국가의 최고 지도자이자 국제법상 외국에 대하여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자격을 갖는 주체)들과 찍은 사진들을 기록으로 남겨 둔다. 국가원수와의 사진은 이승만=>박정희=>이명박을 거쳐 박근혜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마지막이 됐다.


한편, 백선엽 장군은 군 생활을 마친 뒤 1960년부터 1969년까지 주 대만 대사 1년 , 주 프랑스 대사 3년, 주 캐나다 대사 4년 4개월 등 총 8년 4개월을 외교관 생활을 했다. 하여, 7월 13일 오후에 강경화(康京和) 외교부 장관이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백 장군 빈소를 찾아 조문 후 10분가량 유족과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하지만, 강 장관은 방명록에는 자신의 이름 석 자 외 다른 애도 문구를 적지 않아서 강 장관의 정치적 판단이 개입된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고 한다. 백 장군을 둘러싼 친일 논란 등을 의식한 게 아니냐는 얘기였다.

☞백선엽 장군 약력=>▲1920년 11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출생 ▲1940년 3월 평양사범학교 졸업 ▲1941년~1945년 만주군관학교 졸업=만주국 군관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 졸업=국방경비대 입대 중위 임관=군번 54번 ▲1946년 9월~1947년 4월 제5연대 부산 1대대장-연대장-제3여단 참모장 ▲1948년 4월 통위부 정보국장 ▲1948년 11월 대령 진급 ▲1949년 7월 제5사단장 ▲1950년 4월 제1사단장 ▲1950년 7월 준장 진급 ▲1951년 4월 소장 진급=제1군단장 ▲1951년 11월 백(白)야전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 사령관 ▲1952년 1월 중장 진급 ▲1952년 4월 제2 군단장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1953년 1월 대장 진급=한국 최초 ▲1953년 5월 육군대학 총장 겸직 ▲1954년 2월 창설 제1야전군 사령관 ▲1957년 5월 육군참모총장 ▲1959년 2월 연합참모본부 총장 ▲1960년 5월31일 전역 ▲1960년 7월 주 대만 대한민국 대사=1년 ▲1961년 7월 주 프랑스 대한민국 대사=13개 국가 대한민국 대사 겸임=3년 ▲1965년 7월 주 캐나다 대한민국 대사=4년 4개월 ▲1969년 10월 교통부 장관=1년 3개월 ▲1971년 6월 호남비료 사장=2년 ▲1973년 4월 한국종합화학 사장=7년 ▲2007년 2월 이후 대한민국 육군협회 회장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장 ☞저서=>한국전쟁 1,000일(1988), 군(軍)과 나(1989), 실록 지리산(1992), 한국전쟁Ⅰ-Ⅱ-Ⅲ(2000),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2010), 노병은 사라지지 않는다(2012) ☞상훈=>▲금성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금탑산업훈장 ▲미국 은성무공훈장 ▲제2회 미국 자유 수호의 상(Truman-Reagan-Freedom Award)(2000) ▲캐나다 무공훈장(2005) ▲미국 밴플리트 상(2010)

6.25 사변 기간 중 30세의 젊은 장군 백선엽 대한민국 육군 보병 1사단장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매튜 리지웨이, 마크 클라크(유엔군사령관), 월턴 워커, 제임스 밴플리트, 맥스웰 테일러(8군사령관), 프랭크 밀번 1군단장 등등의 눈이 부신 명장(名將)들과 조우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참으로 화려한 젊은 날의 초상이다.

▲서울 재탈환 후인 1951년 3월 24일 육군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이 일본 도쿄에서 한반도로 날아와 서울 서대문 근처 만리동 초등학교에 설치된 육군 제1사단 사령부를 방문한 미국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와 조우했다. 미군 역사상 원수(元帥=5성 장군)는 1. 퍼싱, 2. 마셜, 3. 아널드(미국 유일의 공군 원수), 4. 맥아더, 5. 아이젠하워, 6. 브래들리, 7. 니미츠 제독(해군) 등 총 7명뿐이다.

▲1951년 7월 10일 6.25 휴전을 위한 첫회담 참석 차 개성으로 향하는 헬리콥터 앞에서 백선엽 장군이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을 비롯한 유엔군 측 대표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크레이기 소장, 백선엽 소장, 수석대표 조이 해군 제독, 리지웨이 대장, 호디스 소장.

▲1951년 10월 5일 펀치볼 부근을 시찰한 유엔군 수뇌부. (좌로부터 콜린스 대장, 리지웨이 대장, 밴플리트 대장, 제10군단장 바이어스 소장, 백선엽 소장, 1951. 10. 05) / 於韓國酒缽盆地附近視察的聯合國軍首腦層. (左起 科林斯 上將、李奇威 上將、范弗里特 上將、美第10軍 軍長 拜爾斯 少將、白善燁 少將)/ Inspection des personnalités de premier plan des forces de l'ONU à proximité Punchbowl, Corée. (De gauche à droite : général J. Lawton Collins, le général Matthew Ridgway, le général James Van Fleet, le général commandant de corps X Clovis E. Byers, le général de Paik Sun-yup, 5 octobre 1951.)

당시 이런 미군 주요 지휘관들은 '아버지뻘'인 자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쟁을 수행하던, 아무런 백그라운드도 없는, 그러나 패기만만한 이 30대의 북한 평양 출신의 대한민국 청년 장군 백선엽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본 기자가 그 각각의 미군 주요 지휘관 자신이 아니었으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나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젊은 장군이 참 야무지군(=사람의 성질이나 행동, 생김새 따위가 빈틈이 없이 꽤 단단하고 굳세다.)!" 정도가 아니었을까? 귀신 씨나락 까먹는 헛소리는 아닐 터이다. 왜냐. 본 기자의 이런 추정은 당시 작성됐던 주한 미국군사고문단(KMAG)의 기밀 문서에 근거하고 있으니까.

주한 미국군사고문단(KMAG)이 지난 1951년 말에 작성하여 미국 정부에 보고했던 기밀 문건(1992년에 비밀 해제 됨)에는 주한 미국군사고문단(KMAG)의 백선엽 장군에 대한 평가가 기록돼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승만(李承晩) 당시 초대 대통령에서부터 한국군 일선 주요 사단장까지 6.25 전쟁 지도부 28명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 장면 국무총리, 이기붕 국방부 장관에 대한 주한 미국군사고문단의 평가는 이러했다. "대통령 이승만(李承晩)=76세. 미국 유학생 출신. 친미적 성향이나 본질적으로 정치인. 조금 노쇠. 그의 부인(=프란체스카)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음. 그의 미국인 어드바이서는 무초(주한 미국 대사)와 콜터 장군임. / ▲국무총리 장면(張勉)=55세. 미국 유학생 출신. 가톨릭 신자. 중도 노선의 인사로서 국무총리에 선임됨. 강력하지는 않으나 존경 받음. / ▲국방부 장관 이기붕(李起鵬)=56세. 미국 유학생 출신. 전 서울시장. 그의 입에서는 두 갈래의 말이 나오는 경향이 있음. 국방부 장관으로서의 특권을 소중하게 지킴. 이익이 되는 한 미국과의 공조를 잘 추진해 나갈 것임. 이승만처럼 그의 부인(박마리아)이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함."

한국 장성들에 대한 평가(일부 장군에 대한 내용은 줄임)는 다음과 같다. "▲육군참모총장 이종찬(李鍾贊)=소장, 36세. 일본 육사 출신. 일본 육군 소령, 엔지니어. 1949년 한국 육군에서 대령으로 임명됨. 국방부 장관 이기붕의 친척으로 강한 정치적 배경 가짐. 직업적 성향으로 건실. 자주적 성향. 영어 구사 그런대로 가능. 민족주의적 성향. / ▲육군참모차장 유재흥(劉載興)=소장. 34세. 일본 육사 출신. 일본군 보병 대위 출신. 성공적인 사단장이었으나 군단장으로서는 두 번 실패함. 좋은 조정자. 영어 구사력 양호함. / ▲육군본부 GI(인사참모) 김종오(金鍾五)=준장. 32세. 만주군관학교 출신. 사단장 역임. 경험 부족. (중략) GI로서는 협조적 성향. 영어 구사 가능. / ▲육군본부 G3(작전참모) 이한림(李翰林)=준장. 32세. 만주군관학교 출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중위 출신. 한국 귀족 가문 후손으로 매우 자존심 강하고 민감함. 1948년 베닝(미국 육군보병학교) TIS(고등군사반) 출신. 비협동적 성향. / ▲5군단장 이형근(李亨根)=소장. 32세. 일본 육사 출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보병 대위 출신. 통위부 초대 사령관. 1948년 미국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출신. / ▲수도사단장 송요찬(宋堯讚)=준장 35세. 일본 육사 출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대위 출신. 한국 육군의 경리감 재직 당시 청렴함. 1950년 8월 사단장에 임명됨. 고집이 세고, 그리 명석하지는 않음. 미군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추진 업무를 잘 소화함. 친미적 성향. 영어 구사력 꽤 양호함. / ▲6사단장 장도영(張都瑛)=준장. 29세. 일본군 장교 출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 경험 없음. 1945~1946년 미국 AMGIK(군사학교) 출신. 1950~1951년 11월 육군본부 G2(정보국장)로 탁월하게 근무. 사단장 지휘력 탁월하며, 소장 진급 대기 중. 탁월한 장군들 중의 하나로 사료됨. 친미적 성향. 영어 구사와 독해력 양호함. / ▲훈련소장 백인엽(白仁燁)=준장. 28세. 일본군 장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 경험 없음. 백선엽의 동생. 연대장 지휘력 탁월했음. 그러나 사단장과 육군본부 G2(정보국장)로서는 실패했음. 좋은 교관. 훈련소장으로 잘 배치되었음. 이승만의 총애 받음. 영어 구사력 좋음. 밀착 관찰되어야 할 것임. / ▲1군단장 백선엽(白善燁)=소장. 33세(실제 만 31세=너무 젊었던 그는 당시 대외적 성향으로 자신의 나이를 두 살 올리고 있었다). 만주군관학교 출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중위 출신. 한국 육군에서 최상(best)의 야전 지휘관으로 평가됨. 참모와 지휘관 양쪽 모두 탁월한(excellent) 기록 보유. 친미적 성향. 영어, 중국어, 일본어 구사와 독해 가능. 한국 육군에서 가장 걸출한(most outstanding) 장교임."

부대 차려~~~엇! 참모총장께 대하여 받들어~~~~총!

결론적으로, 한국군 장성들 중 최고의 평가를 받은 인물은 당시의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이었다. 주한 미국군사고문단(KMAG)의 그에 대한 짧은 평가 중엔 최상급을 나타내는 낱말이 세 번(1. best, 2. excellent, 3. most outstanding)이나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본 기자로서는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뒷날, 당시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은 자신의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에서 "한국군 발전의 모든 공로는 휴전회담 조인 당시 16개 전투사단을 지휘한 젊은 백선엽 대장에게 주어져야 한다"면서 "나는 그가 정직함과 용기, 그리고 훌륭한 직업적 능력을 가졌으며, 동시에 항상 팀 플레이를 하는 인물임을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글이 길어질 듯하여, 본 기자는 이만 줄이고자 한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공식 기록 발굴은 여기까지다. 다음에 더 쓸 일이 있을 터이다. 아니면 마는 거고.....


참으로 오랜만에 사진 앨범을 뒤져 백선엽 장군과 내가 같이 남겼던 추억의 옛사진을 찾아서 꺼내들었다. 내 딴에는 자료 보관을 잘 한다고 자부하지만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보관 부실로 이 사진에는 곰팡이가 내려 앉아 있었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세월은 흐르고 추억은 사진으로 남을 뿐인 것을. 이 장면은 다시는 되살려낼 수 없는 서글픈 추억이 돼버렸다.

▲Gen. Paik Sun-yup(2nd from left) & Prof. Alex E. KANG(right) in Seoul, KOREA.

내 소싯적에 만난 백선엽 장군은 젊은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는 영원히 확인이나 검증이 불가능한 사안이 돼버렸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지병으로 건강이 많이 악화돼 최근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고, 6.25 70돌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아쉽다! 그 놀랍던 기억력! 그 빛나던 총기! 이제 영원히 사라졌으니 어디에 가서 6.25사변을 여쭤 볼 수 있으리오! 흐르는 세월이 그저 야속하기만 하다. "노병(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they just fade away!"라던 미국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발언이 나를 울린다.


요컨대,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나는 이역만리 하늘 아래 날아든 백선엽 장군의 부음을 전해 듣고 나서, 신기하리만큼 비통한 마음으로 그분의 별세를 진심으로 애도(哀悼)했다는 것을. 만약, 내게 잘못이 있다면, 내가 전생에 지은 죄(罪)가 많아, 팔자가 기구했던 백의민족의 일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뿐일 게다.

글을 맺는다. 항년 100세! 아아, 얼마나 긴 세월인가! 1부터 100까지 한번도 쉬지 말고 세어 보라! 얼마나 숨이 차는가 말이다! 그 긴 세월을 뒤로 하고 백 장군은 이제 영면에 들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도 대한민국의 융성과 번영을 빌어주시길! 6.25사변 당시 평양 선봉 입성의 주역 백선엽 장군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