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일자가 점점 다가선다.

몽골 캠퍼스는 방학에 들어갔으나, 몽골 현지에서 벌어지는 여러 분야의 취재 업무로 학기 강의 진행 때보다 더욱 더 정신 없이 하루 하루를 보낸다. 그렇지만, 몽골제국 건국 807주년, 몽골독립혁명 92주년을 기념하는 몽골 국가 최대의 행사인 올해 2013년 몽골 나담 축제가 끝나면 세상 없어도 귀국 비행기를 탈 예정이다. 그래 봤자, 9월 초 개강이니 8월 말이면 다시 몽골로 돌아와야 하지만.

7월 중순에 서울 들어 가면, 일단 충무로에 있는 글쓴이 가문의 대종회를 방문해야 하고, 그 다음에 국제태권도대회 통역 맡아야 하고, 8월 초엔 2013년 재외 한국어 교육자 국제학술대회 참가해야 하고, 그리고 부모형제, 친지, 친구들, 선후배들 챙겨야 하고, 몽골인문대학교(UHM)와 MOU 맺은 대학들 순방에다가, 한글학회 방문에다가, 맥주 한 잔 해야지, KBS 본사도 들러 봐야 하고, 아이고 정신 없어라.
이제, 대한민국의 지구촌 반대편에 위치한 온두라스(Honduras)라는 나라에 거주 중인 온두라스(Honduras) 국민인 한국계 강영신 여사의 얘기를 모두(冒頭)로 글을 이어간다.

지난 2010년 3월, 온두라스(Honduras) 정부는 한국계 온두라스(Honduras) 국민인 강영신 여사를 주한 온두라스(Honduras) 대사로 내정하고, 대한민국 이명박 정부에 아그레망(주재국 동의, 프랑스어 Agrément, 접수국이 파견국의 특정 인물을 외교사절로 받아들인다는 동의)을 요청해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2주 뒤, 온두라스(Honduras) 정부는, 온두라스(Honduras) 국내법상 ‘출생 당시부터 온두라스 국적자가 아닌 사람은 해외 공관에 발령을 낼 수 없다’는 규정을 들어, 강영신 여사의 주한 온두라스(Honduras) 대사 아그레망(주재국 동의, 프랑스어 Agrément, 접수국이 파견국의 특정 인물을 외교사절로 받아들인다는 동의)을 철회해버렸다.

그 당시, 글쓴이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며칠 전 한인 동포 2세 교육을 주제로 준비 중인 글 마무리를 위해 인터넷 검색에 나섰다가 강영신 여사가 글쓴이 가문의 핏줄이요, 온두라스한글학교 교장이요, 그 사위가 강영신 여사 대신 주한 온두라스(Honduras) 대사로 대한민국에 부임하여 근무 중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지난 1977년 온두라스(Honduras)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초빙된 한국인 남편 송봉경 사범(2008년 작고)을 따라 온두라스(Honduras)로 이주한 뒤, 1987년 온두라스(Honduras) 국적을 취득했던 강영신 여사는 연합뉴스 인물 정보란에 신천(信川) 강씨로 등재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연합뉴스 인물 정보를 통해 강영신 여사는 글쓴이 가문의 핏줄임이 입증되었다. 서울교대를 나온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다.

  

문득, ‘디아스포라[그리스어 διασπορά=δια(디아, 흩어지다)+σπορά(스포라, 씨앗), 흩어진 씨앗]’라는 낱말을 떠올렸다. 특정 인종(Ethnic) 집단이 자의적이든지 타의적이든지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한자어로는 ‘파종(播種) 또는 이산(離散)’을 의미한다.

그랬다. 대한민국의 지구촌 반대편에 위치한 온두라스(Honduras)에도 글쓴이 가문의 핏줄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글쓴이 가문의 핏줄들이 그야말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던 거다. 대한민국을 온두라스(Honduras)에 알리려고,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았던 1945년도의 '1945'라는 숫자를 휴대전화 뒷번호로 선택할 만큼 조국애가 남다른 여인이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글쓴이 가문의 후손은 남기지 못하겠으되, 그 개척과 도전 정신만은 영원히 온두라스(Honduras)에 남을 것임을 글쓴이는 확신하는 바이다.

이제 본론이다. 연합뉴스 인물 정보란을 찬찬히 살펴 보니, 글쓴이 가문의 혈족들은 신천(信川) 강씨와 곡산(谷山) 강씨로 양분되어 있었다. 글쓴이 가문의 유명인 (존칭 생략) 강신재, 강우혁, 강복창, 강용식, 강완주 등은 신천(信川) 강씨 목록에, (존칭 생략) 강용석, 강봉균, 강인덕, 강금실 등은 곡산(谷山) 강씨 목록에 각각 등재되어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인사들은 글쓴이 가문의 자랑스러운 핏줄들이다. 황해남도 신천군은 글쓴이 가문의 발원지이며, 이 인사들은 글쓴이처럼 호경(虎景) 어른을 가문의 시조로, 지연(之淵) 어른을 가문의 중시조로 추앙하고 있다.

하지만, 동일한 가문 혈족으로 묶여 대대로 계승되던 글쓴이 가문의 계보는 중시조 지연 어른의 7대손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친정 아버지인 윤성(允成) 어른이 상산부원군에 봉해지면서 여러 분관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윤성(允成) 어른의 후손들이 본관인 신천에서 곡산으로의 분관에 나섰고, 이것은 그 뒤 글쓴이 가문의 핏줄들이 우후죽순으로 신천(信川), 곡산(谷山), 재령(載寧), 충원(忠原) 등등의 분관으로 나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제, 마무리로 접어든다. 글쓴이 가문 핏줄들은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가족관계증명서(예전의 호적등본)를 떼어 보면 각자가 사용하는 본관(本貫)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관이 신천(信川)이건 곡산(谷山)이건 황해도 지방에 거주했던 한 조상님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2000년 당시 대한민국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 거주 신천 강씨 혈족들은 13,909가구의 44,259명이었다. 올해가 2013년이니 다소 증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인구를 5,000만 명으로 본다면, 이 수치는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000분의 1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수치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신천(信川) 강씨 핏줄들이 숭조목족(崇祖睦族)을 목적으로 한 덩어리로 뭉쳐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신천 강씨(信川康氏)대종회가 대한민국 충무로에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황해도 지방에 거주했던 한 조상님의 후손인 글쓴이 가문의 핏줄들이 연합뉴스 인물 정보란에 신천(信川) 강씨와 곡산(谷山) 강씨로 나뉘어 등재되어 있는 현실이 글쓴이에게는 못내 서럽기만 하다. 도대체 해결책이 없는 것인가? 글쓴이 가문의 이 분열 상태는 시급히 극복되고 해결되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귀국 일자가 점점 다가선다. 나머지 얘기는 서울에서 하기로 한다. 좌우지간, 그 누구와든 서울에서의 반가운 조우(遭遇)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