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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 기사]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상륙지에 서다

alexalex 2013. 8. 2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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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 기사]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고려 시대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상륙지에 서다
 
고모다하마(小茂田浜) 해변 방문을 통해 한민족으로서의 투철한 애국애국 정신 분발 거듭 다짐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기사입력  2013/08/27 [09:21]
 
 
【쓰시마(일본)=브레이크뉴스 강원평창2018】
2013년 재외 한국어 교육자 국제학술대회 참가 차 잠시 고국을 방문했다가 지난 8월 25일 전격적인 일본 쓰시마(対馬) 시 방문길에 올랐던 대한민국 국적의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가 지난 26일 월요일 오전 고려시대 때 수행됐던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상륙지를 전격 방문했다.

▲ 일본 쓰시마(対馬) 시 전격 방문에 나선 대한민국 국적의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가 전격 방문한 고려시대에 수행됐던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상륙지인 고모다하마(小茂田浜) 해변에 세워진  공원 표지석. 표지석 위에 대한민국 국기인 태극기와 몽골기가 휘날리고 있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는 지난 25일 오후 일본 쓰시마(対馬) 시 북쪽의 히타카츠(Hitakatsu=比田勝)에서 남쪽의 이즈하라(Izuhara=厳原)로  이동해 하룻밤을 보낸 뒤,  26일 월요일 오전, 고려시대에 수행됐던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상륙지인 고모다하마(小茂田浜) 해변을 전격 방문, 고려 시대 일본 원정길에 올랐다가, 일본의 귀신 태풍(일본은 이 귀신 태풍을 '가미카제=みかぜ=風'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폭격으로 촉발된 태평양 전쟁 때의 '가미카제 특공대'의 기원이 된다)으로 희생된 여몽연합군의 투혼과 그 넋을 기렸다.

▲ 일본 쓰시마(対馬) 시 전격 방문에 나선 대한민국 국적의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가 전격 방문한 고려시대에 수행됐던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상륙지인 고모다하마(小茂田浜) 해변 전경. 대한민국 국기인 태극기와 몽골기가 바다 앞에서 휘날렸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몽골 주재 대한민국 재외 국민으로 몽골에 장기 체류 중인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는 일찍이 몽골국립외국어대학교 재임 시절부터 일본 쓰시마(対馬) 시에 상존하는 고려시대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상륙지인 고모다하마(小茂田浜) 해변 방문 의지를 가슴에 깊이 간직했으며, 이미 오래 전에 실행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참 늦은 올해 들어서야 전격적인 고모다하마(小茂田浜) 해변 방문의 꿈을 비로소 실현했다.
 
대한민국 국적 백면서생(白面書生)의 고려시대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상륙지 전격 방문은 현재의 한-몽골 관계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 본 방문의 현장 사진들과 분위기, 느낌, 관점 등은 오는 9월 2일 월요일 각 대학교 별로 입학식을 갖고 일제히 2013년 1학기 개강에 들어 가게 되는 몽골 캠퍼스 강의실에서 몽골 현지 대학 현직 교수인 본 대한민국 국적 백면서생(白面書生)에 의해 앞으로 두고두고 몽골 애(愛)제자들에게 (이미 여러 차례 강의가 이뤄지기는 했었으되) 더욱 생생하게 전달되고 또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일본 쓰시마(対馬) 시 전격 방문에 나선 대한민국 국적의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가 전격 방문한 고려시대에 수행됐던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상륙지인 고모다하마(小茂田浜) 해변에 당당히 섰다. 여몽연합군의 선박이 뒤쪽 바다를 가득 덮었으리라. 대한민국 국기인 태극기와 몽골기가 당당하게 휘날리고 있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고려시대의 여몽연합군 편제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나, 대한민국이 아시아 맹주를 자처하는 중국과 일본의 독주에 대응하고, 자원 부국인 몽골과의 관계를 증진하는 길은, 투철한 애국애족과 역사 의식에 바탕을 둔 바로 이런 몽골 거주 한인 동포들의 몽골 현지에서의 활발한 활동이 튼실한 초석이 됨을 본 기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일본 현지 시각으로 2013년 8월 26일 월요일 오전 11시 30분(대한민국 현지 시각과 같음. 몽골 현지 시각으로는 오전 10시 30분)은 몽골 거주 한인 동포들이나 몽골 현지의 친한(親韓) 성향 몽골 인사들에게도 그야말로 의미 깊은 역사적인 날이다. 몽골 현지 대학 현직 교수인 대한민국 국적 백면서생(白面書生)의 고려시대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상륙지 전격 방문이 실현된 시각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영원히 이 날을 기억하리라.

▲ 1274년 쓰시마(対馬) 섬 남단의 사스우라에 상륙한 여몽연합군의 강공에 2시간만에 궤멸당했던 쓰시마 주재 일본 막부군들을 추념하기 위해 고모다하마(小茂田浜) 해변 근처에 세워진 고모다하마(小茂田浜) 신사(神社) 입구 전경. '귀신 참배' 바람이 갈수록 맹렬해지는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와 함께 일본에서 두 곳 밖에 없다는 이른바 일본 전쟁 잡귀 참배소이다.  일본은 '칼로 흥하는 자, 칼로 망하고, 잡귀 숭배하는 자, 귀신 들려 결딴나나니!' 라는 격언을 명심해야 할 때이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현재, 일본 영토로 되어 있는 쓰시마를 이해하려면, 고려 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빼놓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이 기회를 빌려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정리해 보자.

1.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 1274년(충렬왕 1년) 11월⇒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은 원나라의 홀돈(忽敦)과 함께 9백 척의 함선을 동원, 4만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합포(合浦, 마산)를 출발하여 출항 이틀째인 10월 5일 쓰시마(對馬) 섬 남단의 사스우라에 상륙해 2시간만에 일본 막부군을 궤멸시키고 쓰시마(對馬) 섬을 점령했다. 10월 14일에 이키(壹岐)를 습격하고, 규슈의 하카타항에 도착, 히라도(平戶)·다카시마(鷹島)의 마쓰우라(松浦)의 본거지를 궤멸시키고 다음날 퇴각하였다. '폭풍우 때문에 실패하였다'라는 주장도 있으나 당시는 계절적으로 태풍이나 저기압에 따른 폭풍이 없던 시기이고 일본쪽으로부터도 이를 뒷받침할 기록이 없다. 원나라의 개국을 목표로 1차 군사적 조치를 통한 일본 압박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2. 여몽연합군의 제2차 일본 원정 : 1281년(충렬왕 7년)⇒2차 일본 원정에서는 고려군이 원정군을 지휘했다. 고려를 거쳐 가는 동로군(東路軍)은 수군 900명, 보병 4만명, 강동군(江東軍)은 수군 3,500명, 보병 10만명이었다. 그러나 태풍(일본이 '신풍_神風_가미카제'라고 부르고 있는)으로 인하여 여몽연합군 14만명 중 살아서 한반도로 귀환한 병사는 3만 명에 불과했다. 여기에는 물론 해상의 기후에 대한 인식의 결핍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동시에 당시 일본의 정권을 쥐고 있던 가마쿠라 막부의 완강한 저항과 일본 정벌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던 원나라의 국내 사정에도 원인이 있었다.

▲ 일본 쓰시마(対馬) 시 전격 방문에 나선 대한민국 국적의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가 일본 쓰시마(対馬) 시 고모다하마(小茂田浜) 해변 근처에 일본 전쟁 잡귀들 참배소로 세워진 고모다하마(小茂田浜) 신사(神社) 입구에 당당히 섰다. 강 교수는 일본 전쟁 잡귀 참배를 단호히 거부하고, 일본 원정 길에 올랐다가 귀신 태풍으로 희생된 여몽연합군의 넋을 기렸다. 일본은 '칼로 흥하는 자, 칼로 망하고, 잡귀 숭배하는 자, 귀신 들려 결딴나나니!' 라는 격언을 명심해야 할 때이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아울러, 내친 김에 한민족이 주체가 되어 세 차례(고려가 한 차례, 조선이 두 차례)에 걸쳐 수행됐던 한민족의 쓰시마 정벌(對馬島征伐)도 정리해 본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과 한민족의 쓰시마 정벌(對馬島征伐)을 혼동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두 사건은 엄연히 다른 역사적 사건이다.
한민족의 쓰시마 정벌(對馬島征伐)은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침략하던 일본인 해적인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 섬(대마도)을 한민족(고려가 한 차례, 조선이 두 차례)이 주체가 되어 정벌한 사건이다. 한민족의 쓰시마 정벌(對馬島征伐)을 정리해 본다.

1. 제1차 쓰시마 정벌 : 1389년(고려 창왕 2년) 음력 2월⇒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박위(朴葳)가 병선 100척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盧舍殆)를 진멸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00여 명을 구출해 왔다.

2. 제2차 쓰시마 정벌
: 1396년(조선 태조 5년) 음력 12월⇒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오도 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3. 제3차 쓰시마 정벌
: 1419년(조선 세종 1년)⇒삼군 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가 이끈 정벌로, 조선군은 왜구를 수색하여 100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살라버린 뒤, 명나라 포로 146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쓰시마 도주는 무조건 항복 선언에 나섰고, 이후 쓰시마는 조선의 정치 질서 속에 편입되어 조선 국왕이 관직을 내려주는 통치권 속에 예속됐다.
 
한편, 고려시대 때, 일본의 귀신 태풍(일본은 이 귀신 태풍을 '가미카제=かみかぜ=風'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폭격으로 촉발된 태평양 전쟁 때의 '가미카제 특공대'의 기원이 된다)으로 희생된 여몽연합군의 투혼과 그 넋을 기리기 위해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상륙지인 고모다하마(小茂田浜) 해변을 전격 방문했던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는, 고모다하마(小茂田浜) 해변 방문을 마치고 이즈하라(Izuhara=厳原) 마을로 이동해 쓰시마 섬에 남아 있는 한민족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는 동시에 투철한 애국애국 정신의 분발을 거듭 다짐했다.

▲ 일본 쓰시마(対馬) 시 이즈하라 마을에 세워진 '조선통신사비(朝鮮通信使碑)' 전경.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는 일반적으로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이 일본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을 말한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일본 쓰시마(対馬) 시 전격 방문에 나선 대한민국 국적의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가 일본 쓰시마(対馬) 시 이즈하라 마을에 세워진 '조선통신사비(朝鮮通信使碑)' 옆에 뜨거운 애국심으로 당당히 섰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일본 쓰시마(対馬) 시 전격 방문에 나선 대한민국 국적의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가 일본 쓰시마(対馬) 시 이즈하라 마을에 세워진 '덕혜옹주결혼봉축비(德惠翁主結婚奉祝記念碑])' 에 서서 덕혜옹주의 넋을 기렸다. 덕혜옹주는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과 귀인 양씨의 황녀로서, 1931년에 옛 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의 정략 결혼에 휘말린 비운의 여인이다. 그야말로 만시지탄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일본 쓰시마(対馬) 시 이즈하라 마을에 세워진 '조선통신사 학봉 김성일 시비(朝鮮通信使鶴峰金誠一先生詩碑)'  전경. 임진왜란 발발 2년 전 1590년 조선통신사 부사(副使) 자격으로 일본 정탐에 나선 뒤, 귀국 후 선조 임금에게 '머지 않아 왜구가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의 보고에 맞서,  '그럴 리가 없다'는 보고를 올렸던 인사이다.  당리당략에 휘둘리는 현재 대한민국 위정자들은 우리 한민족의 이런 뼈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하리.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일본 쓰시마(対馬) 시 전격 방문에 나선 대한민국 국적의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가 일본 쓰시마(対馬) 시 이즈하라 마을에 남아 있는 조선통신사 숙소 마루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일본 쓰시마(対馬) 시 이즈하라 마을에 세워진 '면암최익현선생순국비(勉菴崔益鉉先生殉國碑)' 전경.면암 최익현 선생은 일본에 대항해 의병을 일으켰다가 패해 쓰시마 섬으로 유배돼, 쓰시마 섬에서 순국했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일본 쓰시마(対馬) 시 전격 방문에 나선 대한민국 국적의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가 일본 쓰시마(対馬) 시 이즈하라 마을에 세워진 '면암최익현선생순국비(勉菴崔益鉉先生殉國碑)' 옆에 뜨거운 애국심으로 당당히 섰다. 비 옆에는 대한민국 국화 무궁화가 만발해 있었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이제 글을 마무리한다. 쓰시마가 본래 우리 땅이고 반환받아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있다. "백두산은 머리이고, 대관령은 척추이며, 영남은 쓰시마, 호남은 탐라를 양 발로 삼는다(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 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도'의 글귀다.

19세기에 작성된 경상도 지도에서도 쓰시마는 조선 땅이다. 심지어 1945년 발행된 '해방기념판 최신 조선전도'에도 쓰시마는 엄연히 우리 땅이다. 우리 지도만이 아니다. 정한론(征韓論)의 시조 격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1785년 만든 '삼국통람도설' 내의 지도에서도 쓰시마는 조선의 것이다.

비단 지도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사흘 뒤 가진 첫 회견에서 일본 정부에 '쓰시마 반환'을 요구했다. 이듬해 1949년 연두 기자 회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대마(쓰시마)도 반환은 우리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북한의 김성주(⇒김일성)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대한민국을 남침했던 6.25사변이 터지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제기했던 '대마도(쓰시마) 반환 요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한민족으로서는 참으로 뼈아픈 비극의 역사이다.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 보면, 1419년(조선의 제3차 쓰시마 정벌이 수행된 그 다음 해)에 쓰시마 도주는 조선의 속주(屬州)가 될 것을 요청하였고, 조선 조정은 쓰시마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에게 인신(印信)을 하사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역사 기록을 감안해 볼 때, 분명히 쓰시마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조선의 영토였다. "하와이는 미국땅, 대마(쓰시마)도는 조선땅(⇐몰라도⇐일본땅),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랫말이 나오게 된 곡절이 여기에 있다.
  하기야, 당시로 보아서는 산이 전부를 차지할 정도의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땅이었으니 일본 조정이든, 조선 조정이든, 쓰시마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리. 오늘날 이렇게 왜구들이 들어와 살 수 있도록 그냥 방치해 둔 게 안타깝고 입맛이 쓰디 쓸 뿐이다.
  일본이 1855년 러-일 통상 조약 이후 점유했다가 2차 대전 종전 후 도로 빼앗긴 북방 4개 섬을 러시아에게 달라 말라 요구할 입장이라면 쓰시마는 진작에 대한민국에게 토해 놓았어야 옳다. 그게 상식이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alex1210@epos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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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국제 회의 동시 통역사인 알렉스 강 기자는 한-몽골 수교 초창기에 몽골에 입국했으며, 현재 몽골인문대학교(UHM) 한국학과 교수로서 몽골 현지 대학 강단에서 한-몽골 관계 증진의 주역이 될 몽골 꿈나무들을 길러내는 한편, KBS 라디오 몽골 주재 해외 통신원으로서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지구촌에 몽골 현지 소식을 전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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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8/27 [09:21]  최종편집: ⓒ 2018breaknews.com